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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수필 향기

백송이 장미

백송이 장미

딩동... 딩동... 벨 소리가 경쾌하다. 장미꽃 상자가 남편의 사랑을 안고 날아들었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글씨가 일렁인다. 늦깎이로 공부해서 어디 쓰려고 하느냐며 늘 구박하던 그가 웬일로….어떤 어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졸업한 마누라가 기특했던 걸까.

거기다 결혼 삼십 년이 넘도록 꽃 한 송이 선물한 적 없던 남편이니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늘 남편 생일이면 꽃 선물을 하는 내게 금방 시들 꽃을 왜 사느냐며 면박을 주는 남편이다. 정신을 차리고 상자를 여니 내가 제일 좋아한 분홍장미가 그것도 자그마치 백송이다.

마침 졸업식에 참석하러 부산에서 온 여동생은 형부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며 “언니 백송이 장미꽃 받은 기분 어때” “정말 멋있네요.” 하며 놀리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나는 구름 위를 걷듯 마음이 붕 뜨면서 온몸이 떨렸다.

“겉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우리 아빠가 엄마를 정말 사랑하고 누구보다 엄마 졸업을 제일 기뻐하시네.”

하며 딸은 흐르는 내 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처음엔 대학에 입학한 것을 아이들만 알고 남편에게는 숨겼다. 그런데 시험 때면 왜 그리 가족 행사가 많던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나쁜 짓도 아니고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도 싫어 결국 남편에게 말했더니 대뜸 미쳤느냐고 했다. 지금 나이가 얼만데 공부를 하느냐며 정신 차리란다.

나 또한 쉽게 시작한 것이 아니니 당신이 이해해달라고 맞섰다. 한동안 냉랭하던 남편이 수그러들며 집안 행사에는 빠지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일단락되었다. 주말과 휴일에 시험일이 잡혀 늘 애경사에 빠지는 내게 처음엔 싫은 소리를 하던 남편이 나중에는 누구보다도 큰 방패막이가 되었다.

어디 시댁뿐이랴 친정아버지 기일에도 4년 동안 한 번도 참석을 못했지만, 누구보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딸이 못다 이룬 꿈을 향해 가는 걸 기뻐하리라 믿었다. 그러는 내게 못마땅해하고 서운함을 내색하던 엄마가 친정에 들른 내 손에 등록금에 보태라며 엄마에게는 큰돈을 쥐여 주었다.

엄마가 무슨 돈이 있느냐며 받지 않으려는 내게 제대로 공부 못 시킨 엄마 마음 편하자고 주는 것이니 암말 말라며 싫다고 뿌리치는 내 가방에 쑥 넣어주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늦공부를 하며 엄마의 한도 풀어주고 사랑을 확인하며 무엇보다 누구에게 쉽게 자랑 못하는 남편이 주위 사람들에게 마누라 공부하는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는 말을 듣고 기뻤다.

모래알보다 많은 사람 중에 부부 인연은 65억분의 1이라고 한다. 정말 섬뜩할 정도의 기적적인 확률이다. 옷깃만 스쳐도 귀한 인연이라는데 우릴 닮은 자식이 셋이나 있다. 이제는 얼굴만 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모든 걸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부부인가 보다. 평생을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튀지 않은 은은한 백송이 분홍 장미로 행복한 사랑을 고백해 오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우린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을 넘어 살면서 아직도 토닥거리며 싸운다. 내 얼굴에 주름이 많다고 아무 감정 없이 놀리는 남편에게 농담인 줄 알면서도 싸우고, 또 내 머리가 어울리지 않으니 자기식대로 해달라는 남편에게 이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우기다 언성을 높인다.

그와의 삶을 여행하는 동안 성격이 불꽃보다 급한 남편에게는 오 분이 절대적이다. 그 순간을 잘 참고 기다리면 금방 미안해하는 그를 이해하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 이체 가 아닐지.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건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분명히 다를 때가 있다. 이것이 어떻게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늘 부부는 무엇이든 같아야 한다는 시선 때문에 갈등이 많은 것은 아닌지.

지금은 딱 한발 물러나서 역지사지로 남편을 보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얼마나 함께 할지 모르지만, 기적 같은 인연을 끝까지 잘 지키며 또 언제 일지 모를 남편의 꽃 선물도 기다릴 것이다. 분홍장미의 ‘사랑의 맹세, 행복한 사랑’ 꽃말처럼 온 집안에 남편의 사랑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