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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수필 향기

오동 꽃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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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짙어가는 5월 어느 날 문우들과 선운사로 문학 기행을 떠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람 밖 키 큰 오동나무가 실바람에 수많은 보랏빛 꽃 종(鍾)을 딸랑거리며 우리를 반겼다. 오동나무 아래 잔디밭이 평안의 초록이다. 그 초록에 수를 놓은 듯이 꽃잎이 아름답다.

나는 화들짝 달려가 평화의 여신처럼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함께 갔던 문우는 내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나이를 잊은 채 소녀가 되어 서로 오동 꽃을 머리와 귀에 꽂아주며 깔깔대다가 문득 오동나무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내 유년 시절, 고향 집에는 오동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할머니는 손녀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한 그루씩 심으셨다. 한 그루는 언니 나무요, 또 한 그루는 내 나무였다. 할머니는 우리 자매의 혼수 밑천으로 심어놓고 장롱의 재료라며 정성껏 가꾸셨다.

그 나무가 자라 넉넉한 그늘을 만들었을 때, 언니와 나는 오동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소꿉놀이도 하고, 엄마가 꺾어다 준 수숫대의 단맛을 빨며 긴긴 여름날을 시원하게 보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질 때, 오동잎이 우산대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자란 오동나무는 5월이 되면 수많은 보라색 꽃 종을 달고 향기를 피웠다. 나는 할머니 어깨에 무동을 타고 오동 꽃을 따서 할머니 머리에 꽂았고, 할머니는 오동 꽃부리를 만들어 내 머리에 씌워 주셨다. 가을에는 짙은 밤색 열매가 열렸다. 오동 열매는 기름을 짜서 약재로 썼다.

‘봉황새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거문고나 비파를 만드는 장인들은 ‘오동나무 씨만 보아도 춤춘다’라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그 나무를 참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작 언니와 내가 혼인할 즈음에는 오동나무보다 자개장이나 포마이카 장롱이 유행하였다.

할머니가 애써 심고 키워놓은 나무는 그 본분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시 유행이 바뀌어 오동나무가 물에 잘 젖지도 않고, 벌레도 꾀지 않는다고 하여 장롱이나 서랍장으로는 인기가 그만이다. 그 가격 또한 우리의 상상을 한다. 그것도 집에서 웃자란 나무보다 야산에서 더디게 자란 나무가 결이 촘촘하고 고와 가구로는 최상이란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고향의 오동나무는 우리 자매가 결혼하면서 할머니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제멋대로 자라 밭에 그늘을 드리워 곡식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잘라버렸다. 끝내는 간장 다리는 땔감으로 쓰였다는 친정어머니의 말을 듣고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여름 친정에 갔을 때, 밭두렁 오동나무가 서 있던 곳으로 가 보았다. 뜻밖에도 오동나무 새순이 웃자라 있었다. 무성한 잎들을 헤치니 옛날에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여러 갈래의 새순이 자라고 있었다. 살아생전에 할머니의 손길이 배어있는 것 같아 어루만져 주었다.


그때 자르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그 오동나무는 나 대신 딸아이의 혼수용으로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아쉽다. 그곳을 쉬게 뜨지 못하고 서성이는 귓가에 “오메, 내 새끼야!”하며 날 부르는 할머니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오동나무로 악기를 만들면 천 년이 지나도 고운 곡조를 내듯이 우리 할머니의 손녀 사랑도 영원하리라 믿는다.

친정에는 지금도 할머니가 혼수로 해 온 서랍장이 백 년이 된 오동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부잣집 외동딸이었던 할머니는 세월이 흘러 치매를 앓으면서도 하루에 수차례씩 서랍장을 여닫으며 애착(愛着)을 보이셨다.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서랍장은 네 몫이라고 하신다.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손녀라고 하시면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도 안다는 말이 있다. 중년이 된 내가 많은 사람과 깊은 정을 나누며 사는 것도 할머니의 사랑이 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동 꽃을 머리에 꽂은 소녀가 되어 선운사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오동나무를 바라보니 할머니의 인자한 모습이 어른거려 눈앞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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