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엽이 제자리를 찾아 헤매는 가을의 끝자락인 어느 일요일 저녁, 한 텔레비전 특집극을 보게 되었다. 내용인즉 나이 든 아내는 식당 허드렛일을 해서 받은 퇴직금 오백만 원을 은퇴한 남편에게 건넨다. 평생 수고한 당신에게 주는 보너스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남편은 남편대로 “찬물에 손 담그며 돈 벌게 한 것도 가슴 아픈데, 이런 돈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고 마다한다.
이제는 퇴색한 옛 소설 속 같은 장면들이 내 가슴을 헤집어 나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형의 뒷바라지로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중년의 동생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퇴직, 노후에 대한 불안과 자식들에게 받는 소외, 헛살았다는 자책감. 이 시대를 사는 오십 대 이후의 사람들은 한 번쯤 느꼈을 감정들이다. 하기야 요즘은 삼사십 대라고 나을 게 없다. 돌이켜보면 예전 우리네 가정은 가난했지만, 정이 있어 훈훈했다.
박봉이지만 자기 직분에 충실한 아버지, 자식들 먹이고 입히기 위해 궂은일 마다치 않는 어머니, 그리고 부모공경과 형제간의 우애. 그게 우리가 살아온 구시대의 미덕이었다. 무작정 퍼주는 게 부모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그게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자식들은 그런 부모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더구나 부부간에 사소한 일에도 이혼이 다반사인 세상이 돼버렸다. 그래서 K 작가는 사회 변화나 외부충격에 너무도 빨리 붕괴 돼가는 가정의 실상을 잘 그려냈다.
아들의 결혼 축의금을 움켜쥐고 축의금을 달라고 온 아들에게 줄 수 없다면 아들을 돌려보내고 “저희는 맞벌이하면서 여유도 있지 않으냐. 은퇴해서 수입도 없는 우리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느냐.”며 남편과 소주잔을 기울이다 울음이 복받쳐 되려 허허하며 실없는 웃음으로 애쓰는 아내, 바다를 향해 외치는 절규는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듯이 사정없이 내 가슴을 후렸다.
물속에서 건져 올린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본 주인공이 하늘을 향해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은 드라마가 끝난 뒤까지 아픈 여운으로 길게 남는다. 이 세상에 형만 아우 없고 사랑도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걸 나 자신도 실감한다.
연세 많은 부모님보다 남편을 챙기고 남편보다 객지에서 공부하는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나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어머니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자식이 부모 되고 그 자식이 또한 부모 되는 현실에서 어떤 자식이 부모 마음 다 헤아린다고 몇 사람이나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한 편의 드라마가 이렇게 회자하는 것은 요즘 우리네 가슴들이 가을처럼 스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앞만 보고 뛰다가 문득 돌아보니 혼자라는 생각, 사느라 바빠 잊고 산 부모와 형제, 남의 일 같지 않은 자식들의 형태. 그 어느 한 가지 해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것 같다. 비록 가상적인 드라마라 할지라도 나 자신도 많은 반성을 하게 했다. 어느 자식보다 크게 의지하는 친정어머니께 자주 얼굴 보여주지 못하여 죄송하다.
우리 모두의 행복은 가정에서부터라는 걸 일깨워준 드라마가 고맙다. 남편에게 겉으로는 한 번도 표현 못 한 감사한 마음을 전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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